[법의 날 특집] 범죄피해자 지원 현황과 과제
작년 강력범죄 28만 여건… 구조금 지급 205건에 불과
[ 2010-04-28]


서울에 사는 A(28)씨는 주점을 운영하던 어머니가 12년 전 강도를 당해 사망한 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어렵사리 전문대를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며 상처를 잊으려 애썼지만 사건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정신과 치료는 엄두도 못 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결심했지만 먼저 떠난 어머니가 결혼식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A씨의 우울증은 극에 달했다. 그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난해 말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근 김길태사건 등 흉악범죄가 잇달아 발생하면서 범죄피해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건이 발생하면 성금이 전달되고 위로가 전해지긴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금세 사그라졌다. 국민적 관심은 물론이고 정부나 정치권의 범죄피해자대책도 여전히 미흡하기만 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급하는 범죄피해구조금이 최대 3,000만원에 불과해 현실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각종 범죄피해자 구조를 위한 민간기관들도 통일된 하나의 대표전화번호도 없이 흩어져 있어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구조기관을 찾아다녀야 하는 실정이다. 다행히 벌금의 일부를 범죄피해자보호기금으로 사용하는 등 피해자지원을 위한 관련 법률들이 21일 국회를 통과하긴 했지만,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피해자 중심의, 피해자 친화적인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 강력범죄 피해자 대부분 저소득층, 긴급 경비·생활비 등 금전적 지원 절실= 법무부 인권국이 최근 발표한 ‘강력범죄 피해자와 가족의 피해실태 사례연구’에 따르면 조사대상인 178명의 범죄피해자 중 62.9%가 저소득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74%인 131명은 20대 이상 60대 미만에 해당하는 경제활동인구였으며, 절반이 훨씬 넘는 57.1%가 자녀수 1명 이상인 기혼자였다. 범죄피해자의 대다수가 저소득층 가정의 생계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가장’인 것이다.

이에따라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도 긴급경비와 생활비 같은 경제적 지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조사대상자 중 37.4%인 61명이 긴급 경비와 생활비 보조 등 금전적 지원을 1순위 지원 서비스로 선택했다. 이같은 금전적 지원을 2순위로 선택한 응답자도 35.4%에 달했다. 또 과반수 이상인 57%가 범죄로 인한 경제적 피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범죄피해자 대부분이 저소득 가정에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보니 이들 중 70% 이상이 경제적 지원이 우선돼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 부족한 예산·분산된 지원시스템으로 피해자 권리보장 미흡= 범죄 피해자들 대부분이 치료비 부담이나 부상으로 인한 경제활동 중단 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정부의 지원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치안의 ‘사각지대’에서 범죄피해를 당했지만 부족한 예산과 분산된 지원시스템 탓에 범죄피해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법무부 인권국에 따르면 지난 한 해동안 지급된 범죄피해구조금은 22억여원이다. 피해자 지원을 위한 전체 예산도 30여억원 수준이었다. 교정시설 수용자관리 등 범죄자를 위해 사용되는 예산이 2,000억원을 훨씬 넘는 것과 비교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또 지난해 강력범죄 발생건수가 28만여건 이었음에도 실제 피해자에게 전해진 구조금 지급건수는 205건에 불과했다. 전체 강력범죄 피해자의 1%정도만이 겨우 국가의 지원을 받는 셈이다.

범죄피해구조금 지급의 근거법률인 ‘범죄피해자구조법’상의 지급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점도 문제다. 성폭행을 당한 뒤 끔찍하게 살해당한 ‘김길태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은 범죄피해자구조법시행령상의 기준에 따르면 최고 금액인 3,000만원을 지급받을 수 없다. 최고 금액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범죄피해자의 수입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부모’에 해당하고 ‘그와 같은 가족이 3명 이상’이라는 기준을 충족해야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여성들을 납치해 연쇄살해한 ‘강호순사건’의 피해 유족들도 범죄자가 재산이 있어 범죄피해구조금 지급대상에서 제외된다.

노명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범죄피해자 지원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구조금 지급절차가 너무 까다롭다는 것”이라며 “앞으로 법률 개정작업을 통해 절차를 완화시켜 좀 더 많은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무부 인권국에 따르면 범죄피해자의 53.8%가 범죄피해를 당한지 2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범죄피해자 지원기관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년이 지나서 지원기관을 찾는 경우도 15% 이상이었다. 피해자 지원기관들이 분산돼 운영되는 탓에 화재시 ‘119’와 같이 피해를 당했을 경우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떠오르는 통일적인 대표번호 하나 없는 것도 문제다. 실제 36%의 피해자가 수사개시 후 수사기관의 소개를 통해 범죄피해자 지원기관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오경식 강릉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범죄피해자 지원정책에 대한 홍보가 너무 부족하다”며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범죄피해자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예산확충·제도개선·범죄피해자지원 통합 네트워크 구축 등 지원체계 대대적 개선 시급= 이에따라 기존 범죄피해자 지원대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대적인 제도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벌금 징수액의 4%를 범죄피해자보호기금으로 설치해 운용하는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 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예산확충에는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지만, 범죄피해자지원을 위한 통합 네트워크 구축과 새로운 지원정책 마련 등 넘어야 할 산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피해자학회 회장인 박광민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까지 가장 큰 문제는 예산이 부족한 것이었다”며 “예산문제에서 숨통이 트이면 이제는 통합지원체계를 갖추는 등 실효적이고 피해자 친화적인 지원체계 구축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여성부, 교육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등 각 부처별로 지원정책을 펴왔는데 이번 기회에 이를 통합해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며 “특히 119나 112처럼 범죄피해자지원을 위한 대표전화를 만들어 국민들이 피해를 당했을 때 곧바로 한 통화의 전화로 자신에게 필요한 지원을 신속히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산확충이 여전한 과제라는 지적도 있다. 오 교수는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안이 통과 되더라도 600여억원 가량으로 예상되는 기금 중 80%이상이 여성부 등 다른 부처의 범죄피해자 지원사업에 쓰이게 될 움직임이 일고 있다”며 “이렇게 될 경우 범죄피해구조금 지급을 위한 예산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게 된다”고 말했다.
 
이윤상 기자lee27@lawtimes.co.kr